정치 엘리트의 방조와
민주주의의 균열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과정은
언제나 예상보다 조용하고 교묘하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그 핵심을 파고든다.
우리가 흔히
독재자의 등장을 상상할 때는
전통적인 쿠데타나
군사 폭력을 떠올리지만,
실제로 현대의 민주주의는
주류 정치 엘리트들의 방조 속에서
스스로 붕괴하고 있었다.
1945년부터 1968년까지 미국은
기존 전당대회 시스템을 통해
대부분의 아웃사이더 후보들을
차단할 수 있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만이
유일하게 주류 정당의 지지 없이
등장했던 예외였다.
그러나 프라이머리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문이 열렸다.
1972년부터 1992년까지
20년 동안 8명의 아웃사이더가
경선에 출마했고,
1996년 이후 2016년까지는
무려 18명으로 증가했다.
특히 공화당에서
13명의 아웃사이더가
등장했다는 것은
정당 시스템의 문지기 기능이
점차 약화되고 있음을 상징한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두 가지 결정적인 요인이 있었다.
첫째, 2010년 연방대법원의
시티즌 유나이티드 판결 이후
외부 자본이 정치에
쉽게 유입될 수 있게 되었고,
둘째, 케이블 뉴스와
소셜미디어의 성장으로
정치인은 주류 언론을 통하지 않고도
대중적 인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부와 유명세를 지닌 인물이
기존 정치구조를 우회하며
직접 유권자에게
다가설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트럼프는
바로 이 디지털 시대가 만들어낸
정치적 산물이었다.
막대한 부와 유명세,
그리고 대중을 자극하는 언행을 통해
그는 언론을 무료로 활용하며
지지층을 확장해갔다.
기존의 문지기들은
이러한 과정을 저지할 수 없었고,
전당대회에서도
트럼프 지명을 철회하려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현재의 프라이머리 시스템에서는
대의원의 표결 결과가
절대적 권위를 가지며,
이를 뒤집을 제도적 장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독재자의 탄생을 부추기는
착각과 공모
정치 엘리트들은
왜 이러한 위험한 인물을 방조하는가?
저자는 두 가지 심리를 지적한다.
첫째는 통제 가능성에 대한 착각이다.
기존 정치인들은
아웃사이더가 일단 권력을 잡아도
결국 기존 시스템 안에서
길들여질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의 사례에서
오판으로 드러났다.
둘째는 이념적 공모이다.
엘리트들이 아웃사이더와
일정 부분 이해관계를 공유할 때,
그들은 스스로 민주주의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권력 유지에 협력한다.
2016년 미국 대선은
이러한 집단적 포기의 사례다.
트럼프는 민주주의 규범 테스트의
네 가지 항목에서 모두 양성반응을 보였다.
선거결과의 정당성을 부정했고,
경쟁자의 자격을 문제삼으며
오바마의 출생지를 공격했다.
폭력을 조장했고,
비판자와 언론을 탄압하려 했다.

이처럼 민주주의 규범의
핵심이 무너진 상태에서도
공화당 내부에서는
그를 제어할 의지도,
능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독재는 합법의 탈을 쓴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민주주의 전복이
어떻게 법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이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대중적 인기를 기반으로
당선되었지만,
곧 의회를 해산하고
사법부를 장악했다.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가
이끄는 정보기관은
정치인과 판사, 언론인을
뇌물과 협박으로 조종했고,
매수에 실패한 이들은
해임되거나 탄압되었다.
이 같은 방식은
헝가리의 오르반,
폴란드의 법과 정의당,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와 마두로,
터키의 에르도안,
러시아의 푸틴까지 이어진다.
모두가 헌법을 개정하고,
재판관을 교체하며,
언론과 기업을 압박하는 방법으로
권력을 장기화한다.
이 과정은 모두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이루어지기에
외부 세계가 이를 제어하기란
매우 어렵다.
게다가 이들은
경제 위기, 테러, 전쟁 등
국가적 위기를
자신들의 권력 강화 수단으로
악용한다.

필리핀의 마르코스,
독일의 히틀러, 러시아의 푸틴
모두 이러한 방식으로
비상사태를 선포하거나
대중의 공포를 조장해
정적을 탄압하고 권력을 확장했다.
민주주의의 법적 보호장치가
위기 앞에서
얼마나 쉽게 무력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보이지 않는 규범이
지켜온 민주주의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민주주의를 지탱해 온
실질적 보호막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그것은 바로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들이다.
이 규범은 두 가지 핵심 가치로 나뉜다.
첫째는 상호관용이다.
경쟁 정당을 파괴할 대상이 아닌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태도다.
둘째는 제도적 자제이다.
합법적 권한이 있더라도
그 권한을 절제하며 행사하는
신중함이다.
초기의 미국 정치는 그러지 못했다.
연방주의자와 공화주의자는
서로를 국가 파괴세력으로 여겼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경쟁 속 공존의 규범이 자리잡았다.
그러나 역사 속 대부분의
민주주의 붕괴 사례에서
독재자들은
경쟁자를 적으로 규정하며
이 규범을 파괴했다.
제도적 자제의 예로,
미국 대통령의 임기 제한은
오랫동안 관습으로 유지되다가
루즈벨트 이후 헌법으로 규정되었다.
반대로 남미 여러 국가에서는
대통령들이 헌법의 해석을
자의적으로 활용하거나,
의회의 다수를 장악해
대법관을 교체하며
민주주의를 약화시켰다.

칠레 사례는
민주주의 규범 파괴의 전형을 보여준다.
아얀데 대통령 선출 이후
야당은 상원의 불신임 권한을 무기로
장관들을 해임하며
의회 내 힘겨루기를 벌였고,
점차 민주주의가 고립된
투쟁의 장으로 변해갔다.
이렇게 극단적 양극화 속에서
민주주의는 경쟁이 아닌
파괴의 전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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