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스팅과 평가를 통해 배운 와인의 세계
와인은 마시는 술이기도 하지만,
감상하고 평가하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단순히 잔을 기울여
마시는 행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와인의 향과 색, 구조와 질감,
그리고 여운을 천천히 음미하다 보면
와인은 더 이상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향과 맛 속에 품종의 특징,
양조 방식, 숙성 연도, 기후까지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마치 좋은 책의 한 문장을
오랫동안 기억하듯이
우리는 와인을 ‘기억’하게 된다.
이 기억이라는 의미가 중요하다.
앞으로 와인을 공부하면서
어떻게 마시고 기억할 것인지를
한 번 들여다 보고자 한다.
단순히 마시는 것만 아니라
생각하고, 음미하면서
기억에 새겨 넣는 것이다.
테이스팅의 시작은 준비에서부터
좋은 테이스팅은 좋은 환경에서 시작된다.
와인의 맛과 향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는
외부 환경이 중립적이어야 한다.
향이 배어 있지 않은 방,
담배나 향수 냄새가 섞이지 않은 공기,
자연광 아래 흰 배경과
비교하며 보는 시각적 판단은
와인의 외관을 더 정확하게 보여준다.
입 안의 상태도 중요하다.
커피, 껌, 민트, 치약 잔여물이 남아 있다면
향미를 방해할 수 있다.
그래서 테이스팅 전에는
물로 입을 헹구거나,
중립적인 맛의 빵 한 조각으로
입 안을 정리하는 것이 좋다.
전문가들은 와인을 마실 때
ISO 테이스팅 글라스를 사용한다.
이 잔은 향이 집중되도록
위로 좁아지는 튤립 모양이며,
손의 열이 와인에 전달되지 않도록
기다란 손잡이가 달려 있다.
좋은 잔은 향을 담고,
좋은 환경은 감각을 깨운다.
외관에서 드러나는 와인의 상태
와인을 잔에 따르면,
먼저 그 색과 투명도를 살핀다.
와인의 색은 단순히 예쁜 색이 아니라
상태와 나이, 품종을 보여주는 단서다.
예를 들어 레드와인은
덜 숙성될 수록 루비빛을 띠고,
숙성되면 가넷 색조나
브라운 톤으로 바뀐다.
화이트 와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금빛이 짙어지며,
오래된 와인은 녹색 기운이 사라진다.
색이 탁하거나 흐리면 와인이
상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부적절한 보관, 산화,
또는 코르크 결함 때문일 수 있다.
반대로 선명하고 맑은 색은
대체로 양호한 상태임을 암시한다.
요컨대, 시각적 정보는
테이스팅의 첫 단서다.
향, 와인의 첫인상
와인을 잔에 돌리고 향을 맡는다.
이때 느껴지는 향이 바로 ‘코’다.
향은 와인의 품질을 판단하는 핵심 요소다.
상한 와인은 퀴퀴한 젖은 종이 냄새,
곰팡이 냄새가 날 수 있다.
이는 코르크 결함 또는 산화의 흔적이다.
건강한 와인은
과일, 꽃, 나무, 향신료, 흙, 미네랄 등
다양한 향을 복합적으로 품고 있다.
예를 들어, 잘 익은 피노누아에서는
체리, 라즈베리, 은은한 버섯 향이 날 수 있고,
오크 숙성을 거친 샤르도네에서는
바닐라, 토스트, 버터 향이 감돈다.
이 향들을 언어로 묘사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자신만의 테이스팅 노트를 남기고,
자신만의 표현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와인은 더욱 기억에 남을 것이다.
혀와 입 안의 감각
이제 와인을 한 모금 머금고
입 안 곳곳에 굴려본다.
와인의 단맛, 산도, 타닌, 바디, 균형, 여운을
감지하는 과정이다.
단맛은 혀끝에서, 산도는 옆면에서,
떫은맛인 타닌은
잇몸과 혀 뒷부분에서 느껴진다.
이 세 가지 요소가
서로 어떻게 어울리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산도는 와인을 상쾌하게 만들고,
단맛은 부드러움을 더하며,
타닌은 구조감과 입 안의 질감을 형성한다.
타닌이 강한 와인은 혀와 입천장이 마르고
떫은 느낌을 주는데,
이는 숙성 잠재력을 판단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산도가 부족한 와인은 느끼하고 단조롭고,
타닌이 지나치면 거칠게 느껴진다.
와인의 ‘바디’는
입 안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이다.
무거운 바디의 와인은 점성이 있고
풍부한 느낌을 주며,
가벼운 바디는 산뜻하고 섬세하다.
보졸레 같은 라이트한 레드 와인은
낮은 알코올과 타닌으로
가볍고 쉽게 마시기 좋다.
피니시와 맛 – 여운을 남기는 와인
와인을 삼킨 후,
입 안에 남는 여운을 ‘피니시’라 한다.
여운이 길고 풍부하면
좋은 와인일 가능성이 높다.
짧고 뚝 끊기듯 사라지는 맛은
감흥도 짧게 끝난다.
좋은 피니시는 단순한 향 이상의
무언가를 남긴다.
입 안 깊숙이 퍼지는 미세한 향의 잔상,
혀끝에 남는 산도나 타닌의 느낌,
전체적인 조화가 평가의 기준이 된다.
또한 향미 성분이 기화되어
코 뒤쪽으로 올라가면서
풍미가 다시 감지된다.
이는 우리가 감기 걸렸을 때
와인의 향과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좋은 와인의 조건과 추천
좋은 와인이란
단지 맛있는 와인이 아니다.
외관이 맑고 선명하며,
향이 복합적이고 깨끗하고,
맛이 조화롭고 균형 잡혀 있으며,
여운이 길게 남는 와인이 좋은 와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마신 사람의 마음에 남는 와인이
진짜 좋은 와인이라는 점이다.
와인을 추천할 때는
상대의 취향, 자리의 분위기,
음식과의 조화까지 고려해야 한다.
화려한 향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게뷔르츠트라미너 같은
아로마틱 화이트 와인을,
탄탄한 구조감을 선호한다면
까베르네 소비뇽이나 바롤로를
추천할 수 있다.
반면,
무겁고 복잡한 와인을 싫어하는 이에게는
가볍고 산뜻한 와인이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
다음에 와인을 마시게 된다면,
잠시 멈추어 보자.
와인 잔에 담긴 색을 바라보고,
향을 천천히 음미하며,
입 안에서 조용히 굴려보자.
그러면 우리는
단순히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정성,
그리고 이야기가 담긴 경험’을
마시는 것이 된다.
와인을 느끼는 그 순간,
우리는 더 풍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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