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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대한민국 부동산 부의 역사] 직주근접이 만들어낸 부의 지도

by 아콩대디 2025.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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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가치의 핵심은 

결국 사람이 

어디서 어떻게 살고, 일하고, 

네트워크를 형성하느냐에 달려 있다. 

 

『대한민국 부동산 부의 역사』는

교육 외에 부동산을 결정짓는

또 다른 중요한 키워드인 ‘직주근접’의

역사적, 구조적 원인을 추적한다.

 

 

 

 

조선부터 현대까지

이어져 온 이 흐름은

부동산 가치의 본질을

더욱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궁궐과 권력 근처에 몰린

조선의 고급 주거지

 


조선시대 한양의 부동산 가치는 

궁궐과의 거리에 의해 결정됐다. 

 

왕과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것은 

곧 권력과 신분의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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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개경 시절 

정승들이 밀집했던 

정승동이 권력 핵심지였고, 

조선 한양에서는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북촌이 

가장 선호되는 주거지로 자리 잡았다. 

 

북촌은 안국동, 가회동, 재동 

등으로 구성되었고, 

고위직 인사들의 저택이 집중되며 

자연스럽게 명문가의 터전이 되었다.


정조 시기 북촌의 인구밀도는 

한양 평균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18세기 말 기록에 따르면

안국방과 가회방의 가옥 수는 

각각 200여 호에 불과했다. 

 

 

 

대형 저택들이 드물게 분포하며 

권세가의 대물림된 소유가 

이어졌기 때문에 

거래 자체가 활발하지 않았고, 

집값 기록 또한 희소했다.

이러한 부촌의 형성은 

권력과 자본의 결합을 보여준다.

 

북촌 외에도 청운동, 효자동 등

인근 지역이

왕실 일가와 고위 관리들의

주거지로 확장되었다.

 

조선은 중앙집권 체제였기에

권력 중심부로의

주거 밀집 현상은 필연적이었다.

 



상업과 금융의 중심이었던 

종로와 중촌

 


정치 권력의 공간이 북촌이라면, 

상업과 경제 권력의 중심은 

종로 일대의 중촌이었다. 

 

청계천을 따라 형성된 중촌은 

역관, 의관, 율관 등 

전문직 관리들과 

상인들이 밀집한 곳이었다. 

 

종로 시전 상인들은 

금난전권이라는 독점권을 통해 

거대한 부를 축적했고, 

이들은 정치 권력층과 

밀접한 이해관계를 맺으며 

특권적 이권 공동체를 형성했다.

 



특히 역관들은 무역과 외교를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중개무역, 고리대금, 인삼 거래 등 

다방면으로 확장된 이들의 재력은 

조선 최고의 자산가 계층으로 

성장하게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변승업 가문은 

일본어 전문역관으로 활동하며 

금융과 상업 전반을 장악했다.

 

 



종로 일대는 오늘날까지도 

금융과 대기업 본사의 

중심지로 기능한다. 

 

SK본사, 하나은행, 

한국무역보험공사 등이 

이곳에 자리하며 

당시 상업 중심지의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남촌, 

권력 밖에서 성장한 공간의 변천

 


남산 아래 충무로, 명동, 회현동 

등으로 구성된 남촌은 

조선시대 권력에서 비켜선 공간이었다. 

 

이곳은 가난한 선비, 군인가족, 

그리고 남인·소론·소북 등 

비주류 사대부들의 거주지였다. 

 

이순신 역시 

남촌 인현동 출신이었다. 

 

군사 시설이 밀집해 있던 

이 지역은 

한동안 정치적 변방에 머물렀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남촌은 일본인 거주지로 변모했다. 

 

혼마치로 불렸던 충무로 일대는 

일본 자본이 대거 유입되며 

조선인 거주지와 

명확한 구획을 이루었다. 

 

당시 혼마치 거리에는 

미스코시, 히라다, 미나카이, 죠지아 등 

대형 백화점이 

200미터 이내에 밀집해 

‘작은 도쿄’라 불릴 만큼 

일본 자본의 중심지가 되었다.

 

 

 

해방 이후 이 상권은 

신세계·롯데 등 

한국 기업으로 넘어오며 

명동 일대의 

현대적 상업지구로 재탄생했다.

 


 

마포·용산·서강의 성장과 

노동시장 중심지로의 발전

 


한양의 도시 외연이 확장되며 

용산, 마포, 서강 등 한강변은 

노동과 물류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조운선의 최종 도착지였던

경강 일대는 

세곡 운반, 해산물 하역, 

빙고의 얼음 운송 등 

다양한 일자리 창출을 견인했다. 

 

일부 권력층은 사빙고를 운영하며 

얼음 유통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서부 행정구역에 속한 

용산방과 서강방은 

18세기 한양에서 가장 인구가 많았다. 

 

특히 용산방은 4,600호에 달하는 

대규모 주거지가 형성되어 

수도권 외곽의 

주요 노동시장으로 작동했다. 

 

한강은 단순한 수로를 넘어 

도시 확장과 자본 축적의 통로였다.

 



성균관과 반촌이 만들어낸

고유의 경제 생태계

 


성균관 주변 반촌은 

교육과 도축산업이 결합된 

특이한 경제권을 형성했다. 

 

반인은 성균관의 살림을 책임지며 

동시에 도축·정육업을 독점했다. 

 

이들은 고기를 팔아 

학문과 교육을 유지하는 

독특한 시스템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이후 혜화초등학교 설립 등으로 

교육 자산으로 환원되기도 했다.

쇠고기 소비가 늘어나면서 

반촌 경제는 더욱 성장했으나, 

근대화 이후 쇠고기 유통 중심지는 

마장동으로 이동하며 

반촌 경제는 쇠퇴했다. 

 

이는 도시경제의 

기능 분화와 이동이 

어떻게 부동산 가치와 

직결되는지를 보여준다.

 



현대 대기업의 이동과 

직주근접의 심화

 


현대 서울의 부동산 가치는 

대기업들의 입지 변화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두산, 삼성, 현대차, 

롯데, 신세계 등 대기업들은 

성장 단계에 따라 

광화문-을지로-잠실-강남으로 

본사를 이동시켰다. 

 

유통 3사의 본사는 

이제 테헤란로와 올림픽로에 

집중되어 있다. 

 

 

이들 고소득 기업체의 이동은 

곧 부동산 시장의 재평가와 직결된다.

특히 2021년 기준 

국내 5대 그룹의 평균 임금은 

1억 원을 돌파했고, 

2020~2021년 단 1년 동안 

급여 상승률이 161%에 달했다. 

 

임금이 폭발적으로 

상승하는 가운데 

주택가격이 하락할 수 없는 

구조적 압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신흥 IT 기업과 수도권 외곽 성장

 


최근 주가가 급등하는 기업들은 

용인, 화성, 판교 등 

경기 동남권에 몰려 있다.

 

 

 

네카라쿠베, NC소프트 등 

신흥 IT 기업들은 

2010년대 판교로 이전했다가

 2020년대 들어 다시 테헤란로 등 

서울 도심으로 복귀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는 기업 성장이 

다시 고급 오피스 수요를 만들어내며 

직주근접 흐름을 재촉진하는 양상이다.

 



공공기관 이전과 혁신도시의 형성

 

 

혁신도시 특별공급을 통한

공공기관 이전 역시

새로운 주거지

상승 요인을 만들어냈다.

 

 

김천, 진주, 나주 등지의

혁신도시는

가족 동반 이주율이

지속 상승하고 있으며,

젊은 고연봉 근로자 유입으로

기존 지역 부동산 가격을 끌어올렸다.

 

도시의 젊음은

결국 고소득 일자리가 창출하는

자본 집적의 결과다.

 



도심으로 수렴하는 메타버스 소비 패턴

 


메타버스 시대조차 

사람들은 도심을 선호한다. 

 

고소득 직장인들이 밀집한 

서울 주요 상권에 입점한 

카페, 편집숍, F&B 매장들이 

그 증거다. 

 

단순한 인구가 아니라 

소비력 높은 집단이 

어디에 존재하는지가 

입지 가치의 핵심 요인이 되고 있다.

 



직주근접의 역사적 반복은 

현재진행형이다

 

 

『대한민국 부동산 부의 역사』는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직주근접이라는 원리가

일관되게 부동산 시장을

지배해 왔음을 입증한다.

 

 

 

권력에서 기업으로,

왕권에서 대기업과 신흥 IT 기업으로

중심축은 바뀌었지만

핵심 논리는 동일하다.

 

고소득 고용지와의 거리,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내는 네트워크가

부동산 부를 결정하는

본질적 변수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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